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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필로그 2009. 4. 27. 14:13
    삶은여행 2024. 3. 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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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앙금이 남아있는 줄은 몰랐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싶지만 내 마음엔 앙금이 남아있다는 걸 알고있었다는 걸 바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고는 말할 수 있네요. 정말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젠가 그네가 말했던 '7년전 여름, 수목원 가기 위해 동암역에서 오빠를 만날때처럼 낯설지는' 않길 바랬는 데, 그 때 어떻게 얼마나 낯설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미안하게도) 이번 만남 만큼 갑작스럽고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생각해봅니다.

     

    미안하게도 내가 그 여름 그 동암역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마도 그 여름보다 또 4년 전 동암역의  3월의 쌀쌀했던  새벽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억은 나이먹는 것과 상관없이 그다지 공평하지 못한가 봅니다. 그날이 내가 군에 입대하는 날이라서 심지어 날짜까지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단지 자꾸 술자리에서 되뇌어서 기억이 난다고 생각할 뿐 사실 그 새벽의 풍경이 이미지에 남은 거라곤 없다는 걸 알게되는 지금 난 슬퍼합니다.

    기억은 언어를 통해 다시 내 뇌에 기록이 되어있는 거일 뿐이네요. 그날 그 새벽 그 동암역 플랫폼에 긴 생머리를 날리며 서있었던 친구이지만 친구일 수만은 없었던 여인을 기억으로가 아니라 뇌의 기록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날이 그렇게 긴 인연의 시작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낯설었던 나'에 대한 동암역의 기억을 가진 사람보다 내가 가진 동암역의 실루엣을 가진 사람들 우연히라도 다시, 또 다시 만나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멀찍이 회피하려 했었는데, 내가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된 건 내가 애써 피하고 싶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이 더 나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기억은 조금 일상적이지 않고 잔인하기도 합니다. 난 그네들 두사람을 기억합니다. 내 몸이 기억합니다. 그럼 기억하는 주체는 내 마음일까요, 몸일까요? 그런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확실한 건 한 쪽에 용기내어 마음을 열때 한 쪽을 떠났습니다.

    결국엔 모두 떠났지만. 한 쪽은 나를 떠났고, 한 쪽은 내가 떠났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모두 내가 떠났습니다. '결국엔'이 '내가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라는 뜻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그 날 하루가 남는 군요. 그날 만리포 바닷가엔 바람이 몹시도 심하게 불었습니다. 그리곤 단편적인 기억만이 떠오릅니다. 그날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난 불은 땠으나 약간은 쌀쌀했던 한 쪽의 집을 나섰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두운 빛 속에서 뭐라고 끄적끄적 적었던 듯 합니다. 난 예전에 내가 남주려고 썼던 글들을 생각할땐 약간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합니다. 뭐 감정의 편린을 현학적인 말들로 꾸며서 쓰곤 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내 허세적이고 과장된 감정은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이젠 진짜 안녕이리라는 '난 떠나고 싶지 않지만 난 떠날수 밖에 없다'는 식의 허세가 가득한 한 장의 쪽지를 남기고 옷을 주워입고 부지런히 달려 간 곳이 만리포입니다. 그렇게 하루에 두여인을 내 몸은 기억합니다. 하지만 한 쪽은 실패했고, 한 쪽은 성공한 기억이지요. 한 쪽에선 소주 1병 이상만 먹으면 도저히 맥을 못추는 징크스를 이어가던 몸이 단 하루도 안되어 그 징크스를 깼습니다. 그 모든게 마음이었던 거지요.

     

    우린 모두 비겁했습니다. 내가 비겁했고, 그네가 비겁했고, 또 그네도 비겁했습니다. 우린 처음부터 영원할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고, 어느 순간이 오면 서둘러 마무리들을 하려고 이미 마음먹고 시작한 연인들처럼 마무리도 없이 이별을 했고, 연인이면서 연인이지 못했고, 아주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뜨겁길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네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그랬습니다.

    이상하리 만치 그랬습니다. 드라마에 자주나오는 불륜도 없었고, 배신도 배반도 없었고, 이복 형제들도 아니었고, 집안이 원수지간도 아니었습니다. 하다 못해 많은 연인들에게 상처만 남기는 양다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의 나를 생각해내면 지금의 나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농사라는 깃발을 향해 그냥 무턱대고 달려들던 때 입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그네들에게(혹은 그네들이) 오갔던 걸 보면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나 봅니다. 아니면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허함을 채우려 그랬는 지도 모르지요. 나는 그 이상을 함께 할 동지를 필요로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둘은 모두 이상을 쫒는 내가 좋았던 거지. 그 이상이 좋은 건 아니었지요. 용감했지만 현실에서 별 필요는 못느끼는 사람이었겠지요.

    그 용감해 보였던 나도 사실은 겁먹고 있었고 비겁했었습니다. 농사라는 이상 뒤에 나를 숨기고 있었지요. 지금 내손엔 그 이상도 없습니다. 아니 그 핑계도 없습니다. 그저 빈손이 있습니다.

     

    7년전 여름에서 7년이 지났을 때 그네는 이젠 자신의 이상을 찾으러 날아간 미국에서 나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그것이 마지막 소식이었습니다. 의리를 따라 시골을 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던 나는 아주 가끔씩 술먹은 밤에 할일 없이 컴퓨터 앞에 앉으면 검색창에 그 이름을 넣고 엔터를 눌렀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얗게 잊은 것처럼 아무런 소식도 정보도 얻지 못하고 전원을 끄고 잠이 들었지요.

     

    다시 그 7년에서 7년이 지난 일요일에 기습당하듯이 그네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지 얼마안됐다는 걸 알아달라는 듯 가슴에 서양아이를 안은 모습으로 말이지요. 어쩌면 미국에 있을지도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거라고는 왜 생각을 하지 못했을 까요. 아마도 내가 만나려고 찾아다녔다면 더 만나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일이라는게 피한다고 피해지고 만나련다고 만나지는 거든 가요. 그건 죽을때까지도 마음대로 하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나같이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들에겐 아주 가끔 가게되는 상가집에서 알게되는 소식과 만남이 아주 큰 일상의 파문을 주기도 합니다. 마치 돌아가신 분이 선물이라도 던져 주 듯이 말이지요. 이번에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은 내가 고향에 돌아온 선물로 옛 인연들을 많이 돌려주었습니다. 마치 어제도 만났 던 것처럼 자연스런 관계를 되돌려 주기도 하고요, 서로 바뀐 상황들 속에서 세월을 넘어 새로운 설렘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번엔 두가지 선물을 다 받았습니다.

     

    오래전에 동네 친구 아버님 초상이 동암역의 생머리를 다시 만나는 기회가 되었었습니다. 농사를 짓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이미 애딸린 이혼녀가 되어 까만옷을 입고 술잔을 기울이던 그네를 그곳에서 만났지요. 그 전에 마지막으로 그네를 본건 내가 그렇게 금방 군에서 제대할 줄은 나도 그네도 몰랐던 어느 날엔가 그네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다가 역시 제대한지 얼마안된 이번에 상을치른 친구와 둘이 운구를 하고 장지에서 돌아와 아파트 복도에서, 둘이 오랜만에 옛이야기에 젖어 술을 먹다가 그네의 남편이랑 형부에게 쫒겨날 때 입니다. 그때 쫒겨나올 때 얼굴도 안내밀었던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러고 보니 처음 그 친구를 마음에 받아들인건 함께 쫒겨온 이 친구 한테 실연을 당한 그네를 위로하다가 가까와진거네요. 인연 참 얄궂기도 하지요.

    이번 장례식에 그네가 오지않아서 떠난 이 후로 처음 만나게 될까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나, 그네에게서 이 남자친구를 빼앗았던 친구는 저도 이혼녀가 되어 나타나서 내가 다시 또 다른 그네를 뜻하지않게 만나는 단초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금 난 이 돌아온 싱글이라고 장례식장이 떠나가라 깔깔대던 친구가 갑자기 보고 싶고, 술한잔 나누고 싶은 심경입니다. 억지로 생각하자면 그 젊은날에 내가 그네를 위로했던 건 그날 눈만 내리지 않았더라도라고 핑계를 대지만, 이 친구를 넌지시 맘에 두었다가 빼앗긴 서운함과 동질감때문에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선뜻 시작하고 싶지않습니다. 어쩐일인지 이미 그 젊은 날 그랬던 것 처럼, 어느 순간이 오면 마무리를 져야한다고 무언의 동의를 얻고 시작하는 듯 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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